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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 흑사병 빠르게 확산한 요인 영향 받지 않은 한국

by 우아한 맘 2024. 10. 12.

흑사병
흑사병 (출처 : 서울 아산병원)

 

흑사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 중 하나로 중세 유럽과 아시아 국가에 광범위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바이러스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확산했고 중세 유럽의 경우 인구의 1/3을 사망케 하여 남겨진 사람들에게 크나큰 두려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유럽과 아시아 모두 흑사병으로 고통받았지만, 발병을 둘러싼 영향과 상황은 여러 면에서 달랐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흑사병을 일으킨 병원체를 알아보고, 흑사병이 빠르게 확산할 수 있게 한 환경 요인, 당시 우리나라가 흑사병에서 자유로웠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중세 시대 흑사병

흑사병은 살이 썩어 들어가면서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세를 보여 붙인 이름으로, 벼룩이 흑사병 보균을 가진 쥐를 깨물고 그 균을 가진 채 사람을 깨물어 감염시킨 것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박테리아는 세 가지 형태의 페스트, 즉 선형 페스트, 패혈증형 페스트, 폐렴형 페스트를 일으켰으며 흑사병 기간 동안 선형 페스트가 가장 흔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 처음 시작한 것은 1347년으로, 동양의 무역로를 통해 도착한 제노바 함대의 선원들이 시칠리아에 도착한 이후로 유럽 대륙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습니다. 흑사병은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고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불과 몇 년 만에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약 2,00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는 당시 유럽 대륙 인구의 약 30%에 해당합니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 여러 국가가 피해를 입었고, 어떤 곳은 마을과 도시 전체가 흑사병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가 생긴 까닭으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가족과 지역 사회 전체가 전멸하다 보니 버려진 집이 늘어나고, 들판에서 일을 하는 농부는 사라졌으며 사업체만 남게 됐습니다. 사망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노동력이 부족해지며 그로 인해 경제 구조의 변화를 가져왔고, 살아남은 노동자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임금도 상승했습니다. 전반적으로 농업과 생산이 둔화되었습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흑사병이 신의 형벌이라고 믿으며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일부 집단은 극단적인 참회 행위에 참여(채찍질을 함.)하는 반면, 다른 집단은 소외된 집단인 유대인을 중독시키기 위해 우물에 독을 넣거나 질병을 퍼뜨린다고 비난하고 박해하는 등 사회적 불안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감은 고통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흑사병 확산 - 환경적 요인

중세 유럽의 국가에서 흑사병이 통제 불가능한 빠른 속도로 확산한 환경적인 요인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유럽은 도시에 인구가 과하게 많았고, 화장실 문화가 없다 보니 위생은 매우 열악했으며, 기후 변화와 무역으로 인해 흑사병이 더 쉽게 번성하고 확산되었습니다.

인구 과밀화 및 도시화: 14세기 유럽에서는 인구가 크게 증가했고 도시는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도시에는 급격히 늘어난 많은 인구를 감당할 인프라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좁은 구역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고, 화장실이 존재하지 않아 비위생적인 환경(아침에 창 밖으로 배설물을 집어 던져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킬힐과 턱시도 등이 발달하기도 했음.)에서 살았으며, 거리에는 사람의 배설물과 쓰레기, 동물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위생적인 환경은 쥐와 벼룩의 온상이 되어 흑사병 확산의 주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태우지 않고 그저 산처럼 쌓아 놓아서 겉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확산했습니다.

소빙기: 흑사병으로 고생을 하던 당시 유럽은 소빙기(빙하기는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기온이 낮았던 시기) 기간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후 변화를 원인으로 농산물 수확량은 크게 감소하게 했고, 식량이 부족하기에 기근을 겪은 사람들은 점점 약해졌으며 질병에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영양실조가 흔했고, 많은 사람들이 면역 체계가 약해져 전염병에 쉽게 걸리는 환경이었습니다. 소빙기로 인해 추운 날씨가 지속되다보니 쥐들이 집과 헛간으로 몰려들었고, 그러다 보니 인간과의 접촉이 더 밀접하게 돼 질병 확산이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역과 여행: 중세 유럽과 아시아를 상호 연결한 무역로인 실크로드는 흑사병의 급속한 확산을 촉진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질병이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상인과 군인을 통해 서쪽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해상 무역을 통한 세계 상업의 증가가 이뤄지다보니 전염병이 여러 지역과 대륙을 이동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배는 감염된 쥐와 벼룩을 베니스, 제노바, 콘스탄티노플과 같은 주요 항구 도시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흑사병이 무서운 속도로 유럽을 휩쓸게 만드는 완벽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흑사병 증세를 보이는 사람을 격리하고 공중 보건 조치 등 확산을 억제하려는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습니다.

흑사병 영향을 받지 않았던 우리나라 한국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라는 박테리아가 일으키는 흑사병은 1347년부터 1351년까지 유럽 전역에 퍼져 수백만 명이 사망하고 전 지역을 황폐화시켰지만, 당시의 고려 왕조는 흑사병의 영향에서 비교적 자유로웠고 상대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았기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는 공포를 겪지 않았습니다. 고려 시대에 흑사병으로 인한 전염을 피할 수 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고려는 흑사병이 확산하는 주요 통로였던 유럽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실크로드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고립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흑사병의 병원체와 균은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실크로드는 고려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박테리아가 유입될 가능성이 최소화되었습니다.

둘째, 당시 고려는 페스트가 심하게 발생한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의 연관성이 적었습니다.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지배하고 물품과 사람의 이동을 촉진하고 관여했지만, 고려와 몽골의 상호 작용은 중국과 중앙아시아의 상호작용에 비해 훨씬 더 제한적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말기의 우리나라는 몽골의 속국이었지만, 흑사병이 발병한 몽골내의 지역과 무역을 하지 않았고 여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흑사병으로부터 안전했던 대신 천연두와 기타 전염병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유럽의 흑사병과 같은 규모는 아니어서 인구수의 변화에 큰 변동은 없었으며, 질병으로 인해 정치와 사회적 구조가 크게 붕괴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결론

중세 유럽 인구의 1/3을 사망케 했던 흑사병은, 벼룩이 흑사병 보균을 가진 쥐를 깨물고 그 균을 가진 채 사람을 깨물어 감염시킨 것이 원인이라고 알려졌습니다. 14세기의 유럽은 인구 과밀화가 심했고, 빙하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기온이 낮은 소빙기로 인해 곡식이 현저히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추운 날씨로 인해 쥐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사람과 같이 지내게 되어 겉잡을 수 없는 속도로 확산되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동시대의 우리나라는 흑사병이 확산하는 주요 통로였던 실크로드와 지리적으로 거리가 멀어 흑사병을 유발하는 박테리아가 유입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위생의 중요성을 알아 항상 청결을 유지하고, 의학 발전으로 인해 다양한 백신을 맞음으로써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모두가 청결을 유지하기를 바랍니다.